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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영토의 금문도(진먼 섬) 교훈

뙤미모루 2024. 2. 29. 15:41

북한 괴뢰정권 사주로 연평도의 민, 군이 무자비하게 북괴군에 의해 포격 당한  지난 23일의 사건을 접하면서, 우리정부와 국민은 대만정부의 진먼 섬(金門島, 우리에게는 금문도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섬) 사수의지에 대한  역사적 교훈을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서해5도라고 부르기도 하는 행정구역상으로는 인천광역시 옹진군에 속하는 백령도ㆍ대청도ㆍ소청도ㆍ연평도ㆍ우도 등 북한과 인접한 5개의 크고 작은 섬을 일컫는 섬들로서, 연평도를 대연평ㆍ소연평으로 나누기도 하며, 군병력으로는 해병대가 주둔하고 있습니다.

상대 적의 코 앞에 있는 우리나라의 서해 5도 지역과 여건이 비슷한 대만 정부 관할지역으로 중국과 가장 근접하고 있는 진먼 섬, 즉, 금문도는 현재의 중국 본토와는 주룽 강(九龍江, 구룡강) 하구와 샤먼 만(廈門灣, 하문만) 입구를 마주하고 있는 곳으로, 중국의 샤먼시 (廈門市, 하문시)와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중국이 지배하고 있는 지역과는 불과 2.1km 밖에 떨어지지 않아, 과거 국공내전 기간 중에는 국민정부 측의 최전선이 되었던 곳이며, 다진먼 섬(大金門島, 대금문도), 샤오진먼 섬(小金門島, 소금문도) 및 다단 섬(大膽島, 대담도)이나 얼단 섬(二膽島, 이담도)등 12개의 도서로 구성되어 있는 총 면적 150.3397km², 인구는 94,911명(2010)입니다.

우리나라 서해 5도처럼 본토와는 원거리에 있고, 적과 아주 근접하게 위치하고 있는 지역 특성상, 진먼도에서도 지난 1958년 8월 23일부터 10월 5일에 걸쳐 진먼도(金門島)에 주둔하던 대만 해군에 대해 무려 44일 간 47만발의 집중적인 대규모 포격전을 중국인민해방군이 단행한 진먼 포격전(金門砲戰, 혹은 제2차 타이완 해협 위기)이 전개 되었던 사건으로, 10월 5일, 중국 국방부장 펑더화이(彭徳懐)는 인도적인 견지에서 진먼에의 포격을 7일간 정지한다고 발표하였고, 10월 13일에는 다시 2주간의 공격중지를 발표, 중국군의 작전은 적극적인 공격을 멈추는 것으로 전환되었다가 10월 28일에는 중국군이 일방적으로 격일 공격의 방침을 발표하였고 전투는 차츰 줄어들어 갔으며, 최종적으로 전투가 중지된 것은 1979년의 미ㆍ중 국교수립에 의해서, 국교수립 당시 중국 국방부장 쉬샹첸(徐向前)은 『대ㆍ소 진먼도 등의 도서에 대한 포격전 중지 성명(停止砲撃大・小金門等島嶼的聲明)』을 발표, 21년에 걸친 포격전은 마침내 멈추게 되었던 장기간의 작전이었습니다.

최초, 1958년 8월 23일 오후 6시, 중국인민해방군은 진먼도ㆍ소진먼도에 대해 맹렬한 포격을 개시하여, 대만측의 중앙지휘소ㆍ관측소ㆍ교통기관과 포병진지를 목표로 전투개시 2시간 만에 40000발, 1일에 57000발의 포탄이 사용되었으며, 8월 24일, 중국군은 진먼의 탄두진지, 요라만(料羅灣) 부두, 진먼공항 및 포병진지에 대해 포격을 집중시켰고, 8월 25일 이후, 대만군은 진먼에의 해상 보급을 유지하기 위해 야간 보급작전을 행하였지만, 중국군은 수뢰정 등을 동원하여 보급 저지를 꾀하였고, 9월 1일 馬公으로부터 출항한 대만군 보급함이 익일 요라만(料羅灣)에서 중국군 함정과 조우, 9.2해전(九二海戦)이라 불리는 전투가 발생하였으며, 이 전투에 대해, 대만측은 중국군 함정 10여 척이 격침되었다고 발표하였지만, 중국측은 충돌에 의해 2척이 침몰하였고 보급함 沱江号에 큰 피해를 입혔다고 발표하였다. 또 공중전에서는 대만측이 제공권을 확보하였다고 하지만, 이때는 중국과 대만 모두 자국군의 피해를 축소하고 적군의 피해를 부풀려 발표하였다고 판단하여, 근년에 와서 자료의 신빙성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에 대응하여, 대만군은 중국군의 포병진지에 반격을 개시하였고, 중국군은 항만과 공항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여 진먼의 봉쇄를 시도하였지만 진먼 봉쇄작전에 대한 대항수단으로서, 대만정부에 대해, 미국정부는 7함대 대만 해역에 파견하여, 대만군에 대한 물자 보급을 지원함과 동시에, 공군・해병대・육군의 합동 훈련연습을 실시하여 중국측에 경고하고, F-104A 전투기 등을 대만에 급파, 작전지휘센터를 설치하는 등의 적극적인 지원을 하였습니다.

당초, 8월23일에 개시된 포격 후에 중국군은 직접 진먼다오로 침공할 계획이었으나 대만 육군 진먼방위사령부(中華民国陸軍金門防衛司令部, 金防部)사령관이었던 후 리안(胡璉)은 미국 해군의 해상수송 지원을 받으며 진먼도를 사수했고, 그 후 8인치 유탄포를 투입하여, 오히려, 상대측 아모이(하문)의 인민해방군에 반격을 가하므로서, 점차 중국군의 공격 횟수가 줄어들다가 마침내는 대만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실패한 전투로, 당시 전투를 취재하던 한국기자 최병우 등 3개국 기자 5명이 순직했고, 그후로 양안 간에 다시는 대규모 전투가 없었지만, 사실은 이보다 앞서 중국인민해방군은 양안이 분단되던 1949년 10월25일 밤 약 1만명의 병력으로 진먼다오 구닝터우(古寧頭) 연안에 기습 상륙해 3일간 대만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약 3천명이 사망하고 7천명이 포로로 잡히는 치욕을 당하자 9년 후에는 대규모 집중 포격전으로 나섰으나 다시 침공에 실패한 전례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서해 5도서처럼, 진먼 현(한국어: 금문현, 중국어: 金門縣, 병음: Jīnmén Xiàn)은 대만의 푸젠성(福建省, 복건성)에 속해 있는 행정구역으로, 진먼 섬(金門島, 금문도)은, 대, 소금문도와 그 부속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 지역으로, 마쭈열도(馬祖列島, 마조열도)와 함께 이른바 진마 지구(金馬地區, 금마지구)로 불리며, 대만보다 중국 대륙에 훨씬 더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유사한 적전 근접지역에 도서를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대만이 굳건한 자국 영토의 사수의지를 가지고, 무려 47만 발이 넘는 포탄이 사용되어, 전사상 최고의 착탄밀도(着彈密度)라는 기록을 수립하였고, 심지어 당시 포격에 사용된 포탄의 탄신(彈身)에 사용되었던 매우 단단한 경금속(硬金屬)을 분해하여, 전투 후에는 진먼도의 주민들이 이를 재활용해 식칼을 만들게 되어 현재까지도 진먼을 대표하는 특산품이 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이번에 연평도를 공격한 북괴의 화력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막강한 화력으로 중국군은 대만측의 중앙지휘소ㆍ관측소ㆍ교통기관과 포병진지 등을 목표로 공격하여 대만군에서도 44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이때 진먼방위사령부의 부사령 길성문(吉星文)ㆍ조가양(趙家驤)ㆍ장걸(章傑)은 전사하고, 참모장 유명규(劉明奎)와 진먼 시찰 중이던 대만 국방부장 유대유(兪大維)는 부상을 당하기도 했지만, 대만 정부의 철통 같은 유비무환(有備無患)과 명실공히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수호하는 국방의 의무를 살생보국으로 지킨 대만군 장병들의 확고한 신념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금문도 공항의 군인들, 금문국가공원, 팔이삼전쟁기념관, 자이산터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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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문도 1958년 포격전 당시

 

 

 

 

 

 

▲ 北 연평도 포격 당시 사진 첫 공개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이 시작된 23일 오후 2시 32분쯤 해병 연평부대 K9자주포가 포사격 훈련을 종료하기 직전 포탄 공격을 받은 모습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국방부는 25일 이 사진을 공개하면서 해병대 정훈과 송모 하사가 사격 훈련 장면을 찍기 위해 대기했다가 촬영한 장면이라고 설명했다. 국방부 설명에 따르면 K9자주포가 훈련을 위해 연평도 남서쪽 방향을 바라보고 있던 중 북한의 포탄이 후방 진지에 떨어졌다. 이때 튄 파편이 사격 훈련 때 사용되는 장약으로 튀어 불꽃을 만들어 냈으며, 자주포에 탑승하고 있던 포반장이 포탄 소리에 놀라 밖으로 나와 주변을 살피고 있다.
국방부 제공

2010년 11월 23일 북괴의 연평 포격 상황

 

 

 

하지만, 우리군은 이번 북괴의 연평도 포격 상황을 되짚어보면 챙피하고, 부끄럽기 그지 없으니, 천안함 사태 이후에도 끊이지 않고, 육, 해, 공군이 서로 경쟁 하듯이 각종 사고를 유발하는 가 하면, 연평도에 북괴의 포격이 있던 지난 23일에도 각종 정보에 대한 무사안일한 대처는 물론이고, 이날 적의 포격이 개시된 이후 최초 대응사격 시에도 연평의 해병부대에 배치된 K-9 자주포 중 절반만 작동을 했고, 날라오는 적의 포탄을 탐지하라고 배치한 대포병레이더(AN/TPQ-37)마져 제구실을 하지 못해 우리 군 스스로 민.군의 피해를 키웠을 뿐만 아니라, 이날 대응사격에 참가한 자주포의 숫자까지도 국회에 출석한 장관의 말과 합참의 추가 발표사항이 다르고, 대응사격한 아군 자주포의 발수도 국방장관이 누누히 변명하는 교전규칙을 따른다 해도 북한이 쏜 포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사격원점도 제대로 타격하지 못했다는 논란도 이어지고 있는 실태를 볼 때 참으로 한심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북괴의 특성상 우리 대한민국에 대한 공격은 김정일의 지시나 재가를 받지 않고서는 그 누구라도 독단적으로 행할 수 없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우리 정부는 정보의 부재나 정보에 대한 안일한 대처로 화를 초래하고, 그 결과 늘 수동적으로 피해를 입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출처: 서울신문

 

이밖에 북한 내에서 나돌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 ‘소문’에는 ‘북한군이 원래 1차 포격만 계획했는데 남한의 대응타격에 자극받은 강경파 군관(장교)들이 2차 포격을 가했고, 포격전에서 승리했다고 판단한 김정은이 해당부대에 전화를 걸어 높이 치하했다’는 것도 있다고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은 소개했다(인용: 서울신문).

 

 

이미 수년 전부터 서해 5도 지역에서는 지난 1999년 6월 15일에 이미 북괴경비정 등산곶 684호가 25㎜ 기관포로 선제공격을 감행한 제1연평해전이 있었고, 이날 교전에서 참수리급 고속정 325호의 정장 안지영 대위가 부상을 입고, 대한민국 장병 7명이 부상당해 국군수도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었으며, 이에 반해 북괴는 어뢰정 등 함정 2척이 침몰하고 3척이 대파되어, 최소 70여명~200여명의 사상자가 있었으리라 판단 추측하고 있지만, 북괴 해군은 교전에서 생존해 돌아온 등산곶 684호 갑판장을 새 함장으로 임명하고, 우리나라에 대해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우리나라는 당시 교전을 지휘한 해군 2 함대사의 사령관이던 박정성 제독은 임기만료 이전에 대기발령으로 보직을 옮겼다가 군수참모부장과 정보·작전참모부장을 거쳐 군수사령관(소장)으로 전역을 하였으며, 북괴의 선제공격에 의한 제1연평해전을 성공적으로 대처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동아 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사령관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대기발령으로 보직을 옮긴 것은 당시 김대중 정부가 북한의 요구를 무조건 수용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고 하며, 참고 자료는 아래에 제시 하였습니다.

 

 
남북 서해서 교전..남측 사상자 없어 (서울=연합뉴스) 남북한 해군 함정이 10일 오전 10시27분 서해 북방한계선(NLL) 이남 대청도 인근 해상에서 교전했으나 우리측 사상자는 없다고 합동참모본부가 밝혔다. 이번 교전은 1999년 6월15일 1차 연평해전과 2002년 6월29일 2차 연평해전에 이어 7년여 만이다. 사진은 지난 1999년 6월 15일 연평도 인근해역에서 우리 해군고속정과 북한 경비정(오른쪽.680호)이 충돌하고 있는 모습. 2009.11.10 << 연합뉴스 DB >>

 

1999년 6월 15일 참수리급 고속정이 부딪쳐 막는 일명 "밀어내기 작전"으로 대응한 최초의 연평해전 이후, 한일월드컵이 막바지에 이른 2002년 6월 29일 연평도 근해 북방한계선에서 제2연평해전이라고 부르는 해상 무력 충돌이 또 일어으며, 이때는 함포와 기관포를 주고 받는 치열한 격전 후 우리 해군의 피해는 6명이 전사, 18명이 부상하고 참수리급 고속정 357호가 침몰하였고, 북괴의 피해는 약 3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SO-1급 초계정 등산곶 684호가 반파된 채로 퇴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해전에서 정장 윤영하 소령(당시 대위, 1계급 추서)이 그 자리에서 중상을 입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사하고, 부정장 이희완 대위(당시 중위)가 쓰러진 정장을 대신하여 지휘권을 행사했는데 이희완 대위는 한쪽 다리를 잃은 상황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휘하여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었습니다.

군의 통수권자인 대통령을 위시하여, 국방장관을 포함한 외교안보관련 정부요인들의 확고부동한 신념이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에 있다고 하면, 일부 북종세력의 눈치를 보느라고, 우리 스스로 국기를 문란하게 만들지 않도록 정말 대통령이 합참 작전상황실에서 언급한 말로만이 아닌 실제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할 것이며, 이번 북괴의 연평도 포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사건을 계기로 대만정부가 금문도 사수를 위하여 최선을 다 한 전례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 우리나라에서 김대중 정부이래 현재까지 꾸준히 준동하고 있는 좌경세력에 의한 감언이설이나 반미감정의 조장으로 불필요하게 안보의 위협을 자초하지 말고, 우리의 동맹국들과 철저히 공조 할 수 있는 외교력을 발휘하면서, 통합된 연합전력을 효과적으로 운영하므로서, 대만정부가 계란으로 바위를 치듯 한 어려운 가운데 자국의 국민과 영토를 굳건하게 지켜낸 그들의 강건한 의지를 중요한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하루 속히, 우유부단하게 포퓰리즘(populism)으로 대중을 선동하는 친북, 종북세력이나 괴뢰들을 추종하는 인사들은 온국민이 단합해 가차없이 과감하게 척결하여, 우선적으로 대내적인 불협화음을 일소해 나가면서, 앞으로는 실질적으로 보다 더 동맹국과의 유대를 공고히 다지고, 말만으로 뒷 북을 치는 지도자가 아닌, 행동으로 실천하는 국방력의 강화, 즉, 유비무환(有備無患)의 대비태세와 소신과 책임정치의 구현을 진심으로 바라는 바입니다.

북한 괴뢰정권 사주로 연평도의 민, 군이 무자비하게 북괴군에 의해 포격 당한  지난 23일의 사건을 접하면서, 우리정부와 국민은 대만정부의 진먼 섬(金門島, 우리에게는 금문도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섬) 사수의지에 대한  역사적 교훈을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서해5도라고 부르기도 하는 행정구역상으로는 인천광역시 옹진군에 속하는 백령도ㆍ대청도ㆍ소청도ㆍ연평도ㆍ우도 등 북한과 인접한 5개의 크고 작은 섬을 일컫는 섬들로서, 연평도를 대연평ㆍ소연평으로 나누기도 하며, 군병력으로는 해병대가 주둔하고 있습니다.

상대 적의 코 앞에 있는 우리나라의 서해 5도 지역과 여건이 비슷한 대만 정부 관할지역으로 중국과 가장 근접하고 있는 진먼 섬, 즉, 금문도는 현재의 중국 본토와는 주룽 강(九龍江, 구룡강) 하구와 샤먼 만(廈門灣, 하문만) 입구를 마주하고 있는 곳으로, 중국의 샤먼시 (廈門市, 하문시)와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중국이 지배하고 있는 지역과는 불과 2.1km 밖에 떨어지지 않아, 과거 국공내전 기간 중에는 국민정부 측의 최전선이 되었던 곳이며, 다진먼 섬(大金門島, 대금문도), 샤오진먼 섬(小金門島, 소금문도) 및 다단 섬(大膽島, 대담도)이나 얼단 섬(二膽島, 이담도)등 12개의 도서로 구성되어 있는 총 면적 150.3397km², 인구는 94,911명(2010)입니다.

우리나라 서해 5도처럼 본토와는 원거리에 있고, 적과 아주 근접하게 위치하고 있는 지역 특성상, 진먼도에서도 지난 1958년 8월 23일부터 10월 5일에 걸쳐 진먼도(金門島)에 주둔하던 대만 해군에 대해 무려 44일 간 47만발의 집중적인 대규모 포격전을 중국인민해방군이 단행한 진먼 포격전(金門砲戰, 혹은 제2차 타이완 해협 위기)이 전개 되었던 사건으로, 10월 5일, 중국 국방부장 펑더화이(彭徳懐)는 인도적인 견지에서 진먼에의 포격을 7일간 정지한다고 발표하였고, 10월 13일에는 다시 2주간의 공격중지를 발표, 중국군의 작전은 적극적인 공격을 멈추는 것으로 전환되었다가 10월 28일에는 중국군이 일방적으로 격일 공격의 방침을 발표하였고 전투는 차츰 줄어들어 갔으며, 최종적으로 전투가 중지된 것은 1979년의 미ㆍ중 국교수립에 의해서, 국교수립 당시 중국 국방부장 쉬샹첸(徐向前)은 『대ㆍ소 진먼도 등의 도서에 대한 포격전 중지 성명(停止砲撃大・小金門等島嶼的聲明)』을 발표, 21년에 걸친 포격전은 마침내 멈추게 되었던 장기간의 작전이었습니다.

최초, 1958년 8월 23일 오후 6시, 중국인민해방군은 진먼도ㆍ소진먼도에 대해 맹렬한 포격을 개시하여, 대만측의 중앙지휘소ㆍ관측소ㆍ교통기관과 포병진지를 목표로 전투개시 2시간 만에 40000발, 1일에 57000발의 포탄이 사용되었으며, 8월 24일, 중국군은 진먼의 탄두진지, 요라만(料羅灣) 부두, 진먼공항 및 포병진지에 대해 포격을 집중시켰고, 8월 25일 이후, 대만군은 진먼에의 해상 보급을 유지하기 위해 야간 보급작전을 행하였지만, 중국군은 수뢰정 등을 동원하여 보급 저지를 꾀하였고, 9월 1일 馬公으로부터 출항한 대만군 보급함이 익일 요라만(料羅灣)에서 중국군 함정과 조우, 9.2해전(九二海戦)이라 불리는 전투가 발생하였으며, 이 전투에 대해, 대만측은 중국군 함정 10여 척이 격침되었다고 발표하였지만, 중국측은 충돌에 의해 2척이 침몰하였고 보급함 沱江号에 큰 피해를 입혔다고 발표하였다. 또 공중전에서는 대만측이 제공권을 확보하였다고 하지만, 이때는 중국과 대만 모두 자국군의 피해를 축소하고 적군의 피해를 부풀려 발표하였다고 판단하여, 근년에 와서 자료의 신빙성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에 대응하여, 대만군은 중국군의 포병진지에 반격을 개시하였고, 중국군은 항만과 공항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여 진먼의 봉쇄를 시도하였지만 진먼 봉쇄작전에 대한 대항수단으로서, 대만정부에 대해, 미국정부는 7함대 대만 해역에 파견하여, 대만군에 대한 물자 보급을 지원함과 동시에, 공군・해병대・육군의 합동 훈련연습을 실시하여 중국측에 경고하고, F-104A 전투기 등을 대만에 급파, 작전지휘센터를 설치하는 등의 적극적인 지원을 하였습니다.

당초, 8월23일에 개시된 포격 후에 중국군은 직접 진먼다오로 침공할 계획이었으나 대만 육군 진먼방위사령부(中華民国陸軍金門防衛司令部, 金防部)사령관이었던 후 리안(胡璉)은 미국 해군의 해상수송 지원을 받으며 진먼도를 사수했고, 그 후 8인치 유탄포를 투입하여, 오히려, 상대측 아모이(하문)의 인민해방군에 반격을 가하므로서, 점차 중국군의 공격 횟수가 줄어들다가 마침내는 대만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실패한 전투로, 당시 전투를 취재하던 한국기자 최병우 등 3개국 기자 5명이 순직했고, 그후로 양안 간에 다시는 대규모 전투가 없었지만, 사실은 이보다 앞서 중국인민해방군은 양안이 분단되던 1949년 10월25일 밤 약 1만명의 병력으로 진먼다오 구닝터우(古寧頭) 연안에 기습 상륙해 3일간 대만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약 3천명이 사망하고 7천명이 포로로 잡히는 치욕을 당하자 9년 후에는 대규모 집중 포격전으로 나섰으나 다시 침공에 실패한 전례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서해 5도서처럼, 진먼 현(한국어: 금문현, 중국어: 金門縣, 병음: Jīnmén Xiàn)은 대만의 푸젠성(福建省, 복건성)에 속해 있는 행정구역으로, 진먼 섬(金門島, 금문도)은, 대, 소금문도와 그 부속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 지역으로, 마쭈열도(馬祖列島, 마조열도)와 함께 이른바 진마 지구(金馬地區, 금마지구)로 불리며, 대만보다 중국 대륙에 훨씬 더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유사한 적전 근접지역에 도서를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대만이 굳건한 자국 영토의 사수의지를 가지고, 무려 47만 발이 넘는 포탄이 사용되어, 전사상 최고의 착탄밀도(着彈密度)라는 기록을 수립하였고, 심지어 당시 포격에 사용된 포탄의 탄신(彈身)에 사용되었던 매우 단단한 경금속(硬金屬)을 분해하여, 전투 후에는 진먼도의 주민들이 이를 재활용해 식칼을 만들게 되어 현재까지도 진먼을 대표하는 특산품이 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이번에 연평도를 공격한 북괴의 화력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막강한 화력으로 중국군은 대만측의 중앙지휘소ㆍ관측소ㆍ교통기관과 포병진지 등을 목표로 공격하여 대만군에서도 44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이때 진먼방위사령부의 부사령 길성문(吉星文)ㆍ조가양(趙家驤)ㆍ장걸(章傑)은 전사하고, 참모장 유명규(劉明奎)와 진먼 시찰 중이던 대만 국방부장 유대유(兪大維)는 부상을 당하기도 했지만, 대만 정부의 철통 같은 유비무환(有備無患)과 명실공히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수호하는 국방의 의무를 살생보국으로 지킨 대만군 장병들의 확고한 신념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금문도 공항의 군인들, 금문국가공원, 팔이삼전쟁기념관, 자이산터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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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문도 1958년 포격전 당시

 

 

 

 

 

 

▲ 北 연평도 포격 당시 사진 첫 공개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이 시작된 23일 오후 2시 32분쯤 해병 연평부대 K9자주포가 포사격 훈련을 종료하기 직전 포탄 공격을 받은 모습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국방부는 25일 이 사진을 공개하면서 해병대 정훈과 송모 하사가 사격 훈련 장면을 찍기 위해 대기했다가 촬영한 장면이라고 설명했다. 국방부 설명에 따르면 K9자주포가 훈련을 위해 연평도 남서쪽 방향을 바라보고 있던 중 북한의 포탄이 후방 진지에 떨어졌다. 이때 튄 파편이 사격 훈련 때 사용되는 장약으로 튀어 불꽃을 만들어 냈으며, 자주포에 탑승하고 있던 포반장이 포탄 소리에 놀라 밖으로 나와 주변을 살피고 있다.
국방부 제공

2010년 11월 23일 북괴의 연평 포격 상황

 

 

 

하지만, 우리군은 이번 북괴의 연평도 포격 상황을 되짚어보면 챙피하고, 부끄럽기 그지 없으니, 천안함 사태 이후에도 끊이지 않고, 육, 해, 공군이 서로 경쟁 하듯이 각종 사고를 유발하는 가 하면, 연평도에 북괴의 포격이 있던 지난 23일에도 각종 정보에 대한 무사안일한 대처는 물론이고, 이날 적의 포격이 개시된 이후 최초 대응사격 시에도 연평의 해병부대에 배치된 K-9 자주포 중 절반만 작동을 했고, 날라오는 적의 포탄을 탐지하라고 배치한 대포병레이더(AN/TPQ-37)마져 제구실을 하지 못해 우리 군 스스로 민.군의 피해를 키웠을 뿐만 아니라, 이날 대응사격에 참가한 자주포의 숫자까지도 국회에 출석한 장관의 말과 합참의 추가 발표사항이 다르고, 대응사격한 아군 자주포의 발수도 국방장관이 누누히 변명하는 교전규칙을 따른다 해도 북한이 쏜 포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사격원점도 제대로 타격하지 못했다는 논란도 이어지고 있는 실태를 볼 때 참으로 한심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북괴의 특성상 우리 대한민국에 대한 공격은 김정일의 지시나 재가를 받지 않고서는 그 누구라도 독단적으로 행할 수 없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우리 정부는 정보의 부재나 정보에 대한 안일한 대처로 화를 초래하고, 그 결과 늘 수동적으로 피해를 입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출처: 서울신문

 

이밖에 북한 내에서 나돌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 ‘소문’에는 ‘북한군이 원래 1차 포격만 계획했는데 남한의 대응타격에 자극받은 강경파 군관(장교)들이 2차 포격을 가했고, 포격전에서 승리했다고 판단한 김정은이 해당부대에 전화를 걸어 높이 치하했다’는 것도 있다고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은 소개했다(인용: 서울신문).

 

 

이미 수년 전부터 서해 5도 지역에서는 지난 1999년 6월 15일에 이미 북괴경비정 등산곶 684호가 25㎜ 기관포로 선제공격을 감행한 제1연평해전이 있었고, 이날 교전에서 참수리급 고속정 325호의 정장 안지영 대위가 부상을 입고, 대한민국 장병 7명이 부상당해 국군수도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었으며, 이에 반해 북괴는 어뢰정 등 함정 2척이 침몰하고 3척이 대파되어, 최소 70여명~200여명의 사상자가 있었으리라 판단 추측하고 있지만, 북괴 해군은 교전에서 생존해 돌아온 등산곶 684호 갑판장을 새 함장으로 임명하고, 우리나라에 대해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우리나라는 당시 교전을 지휘한 해군 2 함대사의 사령관이던 박정성 제독은 임기만료 이전에 대기발령으로 보직을 옮겼다가 군수참모부장과 정보·작전참모부장을 거쳐 군수사령관(소장)으로 전역을 하였으며, 북괴의 선제공격에 의한 제1연평해전을 성공적으로 대처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동아 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사령관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대기발령으로 보직을 옮긴 것은 당시 김대중 정부가 북한의 요구를 무조건 수용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고 하며, 참고 자료는 아래에 제시 하였습니다.

 

 
남북 서해서 교전..남측 사상자 없어 (서울=연합뉴스) 남북한 해군 함정이 10일 오전 10시27분 서해 북방한계선(NLL) 이남 대청도 인근 해상에서 교전했으나 우리측 사상자는 없다고 합동참모본부가 밝혔다. 이번 교전은 1999년 6월15일 1차 연평해전과 2002년 6월29일 2차 연평해전에 이어 7년여 만이다. 사진은 지난 1999년 6월 15일 연평도 인근해역에서 우리 해군고속정과 북한 경비정(오른쪽.680호)이 충돌하고 있는 모습. 2009.11.10 << 연합뉴스 DB >>

 

1999년 6월 15일 참수리급 고속정이 부딪쳐 막는 일명 "밀어내기 작전"으로 대응한 최초의 연평해전 이후, 한일월드컵이 막바지에 이른 2002년 6월 29일 연평도 근해 북방한계선에서 제2연평해전이라고 부르는 해상 무력 충돌이 또 일어으며, 이때는 함포와 기관포를 주고 받는 치열한 격전 후 우리 해군의 피해는 6명이 전사, 18명이 부상하고 참수리급 고속정 357호가 침몰하였고, 북괴의 피해는 약 3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SO-1급 초계정 등산곶 684호가 반파된 채로 퇴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해전에서 정장 윤영하 소령(당시 대위, 1계급 추서)이 그 자리에서 중상을 입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사하고, 부정장 이희완 대위(당시 중위)가 쓰러진 정장을 대신하여 지휘권을 행사했는데 이희완 대위는 한쪽 다리를 잃은 상황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휘하여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었습니다.

군의 통수권자인 대통령을 위시하여, 국방장관을 포함한 외교안보관련 정부요인들의 확고부동한 신념이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에 있다고 하면, 일부 북종세력의 눈치를 보느라고, 우리 스스로 국기를 문란하게 만들지 않도록 정말 대통령이 합참 작전상황실에서 언급한 말로만이 아닌 실제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할 것이며, 이번 북괴의 연평도 포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사건을 계기로 대만정부가 금문도 사수를 위하여 최선을 다 한 전례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 우리나라에서 김대중 정부이래 현재까지 꾸준히 준동하고 있는 좌경세력에 의한 감언이설이나 반미감정의 조장으로 불필요하게 안보의 위협을 자초하지 말고, 우리의 동맹국들과 철저히 공조 할 수 있는 외교력을 발휘하면서, 통합된 연합전력을 효과적으로 운영하므로서, 대만정부가 계란으로 바위를 치듯 한 어려운 가운데 자국의 국민과 영토를 굳건하게 지켜낸 그들의 강건한 의지를 중요한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하루 속히, 우유부단하게 포퓰리즘(populism)으로 대중을 선동하는 친북, 종북세력이나 괴뢰들을 추종하는 인사들은 온국민이 단합해 가차없이 과감하게 척결하여, 우선적으로 대내적인 불협화음을 일소해 나가면서, 앞으로는 실질적으로 보다 더 동맹국과의 유대를 공고히 다지고, 말만으로 뒷 북을 치는 지도자가 아닌, 행동으로 실천하는 국방력의 강화, 즉, 유비무환(有備無患)의 대비태세와 소신과 책임정치의 구현을 진심으로 바라는 바입니다.

북한 괴뢰정권 사주로 연평도의 민, 군이 무자비하게 북괴군에 의해 포격 당한  지난 23일의 사건을 접하면서, 우리정부와 국민은 대만정부의 진먼 섬(金門島, 우리에게는 금문도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섬) 사수의지에 대한  역사적 교훈을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서해5도라고 부르기도 하는 행정구역상으로는 인천광역시 옹진군에 속하는 백령도ㆍ대청도ㆍ소청도ㆍ연평도ㆍ우도 등 북한과 인접한 5개의 크고 작은 섬을 일컫는 섬들로서, 연평도를 대연평ㆍ소연평으로 나누기도 하며, 군병력으로는 해병대가 주둔하고 있습니다.

상대 적의 코 앞에 있는 우리나라의 서해 5도 지역과 여건이 비슷한 대만 정부 관할지역으로 중국과 가장 근접하고 있는 진먼 섬, 즉, 금문도는 현재의 중국 본토와는 주룽 강(九龍江, 구룡강) 하구와 샤먼 만(廈門灣, 하문만) 입구를 마주하고 있는 곳으로, 중국의 샤먼시 (廈門市, 하문시)와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중국이 지배하고 있는 지역과는 불과 2.1km 밖에 떨어지지 않아, 과거 국공내전 기간 중에는 국민정부 측의 최전선이 되었던 곳이며, 다진먼 섬(大金門島, 대금문도), 샤오진먼 섬(小金門島, 소금문도) 및 다단 섬(大膽島, 대담도)이나 얼단 섬(二膽島, 이담도)등 12개의 도서로 구성되어 있는 총 면적 150.3397km², 인구는 94,911명(2010)입니다.

우리나라 서해 5도처럼 본토와는 원거리에 있고, 적과 아주 근접하게 위치하고 있는 지역 특성상, 진먼도에서도 지난 1958년 8월 23일부터 10월 5일에 걸쳐 진먼도(金門島)에 주둔하던 대만 해군에 대해 무려 44일 간 47만발의 집중적인 대규모 포격전을 중국인민해방군이 단행한 진먼 포격전(金門砲戰, 혹은 제2차 타이완 해협 위기)이 전개 되었던 사건으로, 10월 5일, 중국 국방부장 펑더화이(彭徳懐)는 인도적인 견지에서 진먼에의 포격을 7일간 정지한다고 발표하였고, 10월 13일에는 다시 2주간의 공격중지를 발표, 중국군의 작전은 적극적인 공격을 멈추는 것으로 전환되었다가 10월 28일에는 중국군이 일방적으로 격일 공격의 방침을 발표하였고 전투는 차츰 줄어들어 갔으며, 최종적으로 전투가 중지된 것은 1979년의 미ㆍ중 국교수립에 의해서, 국교수립 당시 중국 국방부장 쉬샹첸(徐向前)은 『대ㆍ소 진먼도 등의 도서에 대한 포격전 중지 성명(停止砲撃大・小金門等島嶼的聲明)』을 발표, 21년에 걸친 포격전은 마침내 멈추게 되었던 장기간의 작전이었습니다.

최초, 1958년 8월 23일 오후 6시, 중국인민해방군은 진먼도ㆍ소진먼도에 대해 맹렬한 포격을 개시하여, 대만측의 중앙지휘소ㆍ관측소ㆍ교통기관과 포병진지를 목표로 전투개시 2시간 만에 40000발, 1일에 57000발의 포탄이 사용되었으며, 8월 24일, 중국군은 진먼의 탄두진지, 요라만(料羅灣) 부두, 진먼공항 및 포병진지에 대해 포격을 집중시켰고, 8월 25일 이후, 대만군은 진먼에의 해상 보급을 유지하기 위해 야간 보급작전을 행하였지만, 중국군은 수뢰정 등을 동원하여 보급 저지를 꾀하였고, 9월 1일 馬公으로부터 출항한 대만군 보급함이 익일 요라만(料羅灣)에서 중국군 함정과 조우, 9.2해전(九二海戦)이라 불리는 전투가 발생하였으며, 이 전투에 대해, 대만측은 중국군 함정 10여 척이 격침되었다고 발표하였지만, 중국측은 충돌에 의해 2척이 침몰하였고 보급함 沱江号에 큰 피해를 입혔다고 발표하였다. 또 공중전에서는 대만측이 제공권을 확보하였다고 하지만, 이때는 중국과 대만 모두 자국군의 피해를 축소하고 적군의 피해를 부풀려 발표하였다고 판단하여, 근년에 와서 자료의 신빙성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에 대응하여, 대만군은 중국군의 포병진지에 반격을 개시하였고, 중국군은 항만과 공항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여 진먼의 봉쇄를 시도하였지만 진먼 봉쇄작전에 대한 대항수단으로서, 대만정부에 대해, 미국정부는 7함대 대만 해역에 파견하여, 대만군에 대한 물자 보급을 지원함과 동시에, 공군・해병대・육군의 합동 훈련연습을 실시하여 중국측에 경고하고, F-104A 전투기 등을 대만에 급파, 작전지휘센터를 설치하는 등의 적극적인 지원을 하였습니다.

당초, 8월23일에 개시된 포격 후에 중국군은 직접 진먼다오로 침공할 계획이었으나 대만 육군 진먼방위사령부(中華民国陸軍金門防衛司令部, 金防部)사령관이었던 후 리안(胡璉)은 미국 해군의 해상수송 지원을 받으며 진먼도를 사수했고, 그 후 8인치 유탄포를 투입하여, 오히려, 상대측 아모이(하문)의 인민해방군에 반격을 가하므로서, 점차 중국군의 공격 횟수가 줄어들다가 마침내는 대만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실패한 전투로, 당시 전투를 취재하던 한국기자 최병우 등 3개국 기자 5명이 순직했고, 그후로 양안 간에 다시는 대규모 전투가 없었지만, 사실은 이보다 앞서 중국인민해방군은 양안이 분단되던 1949년 10월25일 밤 약 1만명의 병력으로 진먼다오 구닝터우(古寧頭) 연안에 기습 상륙해 3일간 대만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약 3천명이 사망하고 7천명이 포로로 잡히는 치욕을 당하자 9년 후에는 대규모 집중 포격전으로 나섰으나 다시 침공에 실패한 전례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서해 5도서처럼, 진먼 현(한국어: 금문현, 중국어: 金門縣, 병음: Jīnmén Xiàn)은 대만의 푸젠성(福建省, 복건성)에 속해 있는 행정구역으로, 진먼 섬(金門島, 금문도)은, 대, 소금문도와 그 부속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 지역으로, 마쭈열도(馬祖列島, 마조열도)와 함께 이른바 진마 지구(金馬地區, 금마지구)로 불리며, 대만보다 중국 대륙에 훨씬 더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유사한 적전 근접지역에 도서를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대만이 굳건한 자국 영토의 사수의지를 가지고, 무려 47만 발이 넘는 포탄이 사용되어, 전사상 최고의 착탄밀도(着彈密度)라는 기록을 수립하였고, 심지어 당시 포격에 사용된 포탄의 탄신(彈身)에 사용되었던 매우 단단한 경금속(硬金屬)을 분해하여, 전투 후에는 진먼도의 주민들이 이를 재활용해 식칼을 만들게 되어 현재까지도 진먼을 대표하는 특산품이 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이번에 연평도를 공격한 북괴의 화력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막강한 화력으로 중국군은 대만측의 중앙지휘소ㆍ관측소ㆍ교통기관과 포병진지 등을 목표로 공격하여 대만군에서도 44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이때 진먼방위사령부의 부사령 길성문(吉星文)ㆍ조가양(趙家驤)ㆍ장걸(章傑)은 전사하고, 참모장 유명규(劉明奎)와 진먼 시찰 중이던 대만 국방부장 유대유(兪大維)는 부상을 당하기도 했지만, 대만 정부의 철통 같은 유비무환(有備無患)과 명실공히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수호하는 국방의 의무를 살생보국으로 지킨 대만군 장병들의 확고한 신념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금문도 공항의 군인들, 금문국가공원, 팔이삼전쟁기념관, 자이산터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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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문도 1958년 포격전 당시

 

 

 

 

 

 

▲ 北 연평도 포격 당시 사진 첫 공개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이 시작된 23일 오후 2시 32분쯤 해병 연평부대 K9자주포가 포사격 훈련을 종료하기 직전 포탄 공격을 받은 모습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국방부는 25일 이 사진을 공개하면서 해병대 정훈과 송모 하사가 사격 훈련 장면을 찍기 위해 대기했다가 촬영한 장면이라고 설명했다. 국방부 설명에 따르면 K9자주포가 훈련을 위해 연평도 남서쪽 방향을 바라보고 있던 중 북한의 포탄이 후방 진지에 떨어졌다. 이때 튄 파편이 사격 훈련 때 사용되는 장약으로 튀어 불꽃을 만들어 냈으며, 자주포에 탑승하고 있던 포반장이 포탄 소리에 놀라 밖으로 나와 주변을 살피고 있다.
국방부 제공

2010년 11월 23일 북괴의 연평 포격 상황

 

 

 

하지만, 우리군은 이번 북괴의 연평도 포격 상황을 되짚어보면 챙피하고, 부끄럽기 그지 없으니, 천안함 사태 이후에도 끊이지 않고, 육, 해, 공군이 서로 경쟁 하듯이 각종 사고를 유발하는 가 하면, 연평도에 북괴의 포격이 있던 지난 23일에도 각종 정보에 대한 무사안일한 대처는 물론이고, 이날 적의 포격이 개시된 이후 최초 대응사격 시에도 연평의 해병부대에 배치된 K-9 자주포 중 절반만 작동을 했고, 날라오는 적의 포탄을 탐지하라고 배치한 대포병레이더(AN/TPQ-37)마져 제구실을 하지 못해 우리 군 스스로 민.군의 피해를 키웠을 뿐만 아니라, 이날 대응사격에 참가한 자주포의 숫자까지도 국회에 출석한 장관의 말과 합참의 추가 발표사항이 다르고, 대응사격한 아군 자주포의 발수도 국방장관이 누누히 변명하는 교전규칙을 따른다 해도 북한이 쏜 포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사격원점도 제대로 타격하지 못했다는 논란도 이어지고 있는 실태를 볼 때 참으로 한심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북괴의 특성상 우리 대한민국에 대한 공격은 김정일의 지시나 재가를 받지 않고서는 그 누구라도 독단적으로 행할 수 없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우리 정부는 정보의 부재나 정보에 대한 안일한 대처로 화를 초래하고, 그 결과 늘 수동적으로 피해를 입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출처: 서울신문

 

이밖에 북한 내에서 나돌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 ‘소문’에는 ‘북한군이 원래 1차 포격만 계획했는데 남한의 대응타격에 자극받은 강경파 군관(장교)들이 2차 포격을 가했고, 포격전에서 승리했다고 판단한 김정은이 해당부대에 전화를 걸어 높이 치하했다’는 것도 있다고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은 소개했다(인용: 서울신문).

 

 

이미 수년 전부터 서해 5도 지역에서는 지난 1999년 6월 15일에 이미 북괴경비정 등산곶 684호가 25㎜ 기관포로 선제공격을 감행한 제1연평해전이 있었고, 이날 교전에서 참수리급 고속정 325호의 정장 안지영 대위가 부상을 입고, 대한민국 장병 7명이 부상당해 국군수도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었으며, 이에 반해 북괴는 어뢰정 등 함정 2척이 침몰하고 3척이 대파되어, 최소 70여명~200여명의 사상자가 있었으리라 판단 추측하고 있지만, 북괴 해군은 교전에서 생존해 돌아온 등산곶 684호 갑판장을 새 함장으로 임명하고, 우리나라에 대해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우리나라는 당시 교전을 지휘한 해군 2 함대사의 사령관이던 박정성 제독은 임기만료 이전에 대기발령으로 보직을 옮겼다가 군수참모부장과 정보·작전참모부장을 거쳐 군수사령관(소장)으로 전역을 하였으며, 북괴의 선제공격에 의한 제1연평해전을 성공적으로 대처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동아 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사령관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대기발령으로 보직을 옮긴 것은 당시 김대중 정부가 북한의 요구를 무조건 수용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고 하며, 참고 자료는 아래에 제시 하였습니다.

 

 
남북 서해서 교전..남측 사상자 없어 (서울=연합뉴스) 남북한 해군 함정이 10일 오전 10시27분 서해 북방한계선(NLL) 이남 대청도 인근 해상에서 교전했으나 우리측 사상자는 없다고 합동참모본부가 밝혔다. 이번 교전은 1999년 6월15일 1차 연평해전과 2002년 6월29일 2차 연평해전에 이어 7년여 만이다. 사진은 지난 1999년 6월 15일 연평도 인근해역에서 우리 해군고속정과 북한 경비정(오른쪽.680호)이 충돌하고 있는 모습. 2009.11.10 << 연합뉴스 DB >>

 

1999년 6월 15일 참수리급 고속정이 부딪쳐 막는 일명 "밀어내기 작전"으로 대응한 최초의 연평해전 이후, 한일월드컵이 막바지에 이른 2002년 6월 29일 연평도 근해 북방한계선에서 제2연평해전이라고 부르는 해상 무력 충돌이 또 일어으며, 이때는 함포와 기관포를 주고 받는 치열한 격전 후 우리 해군의 피해는 6명이 전사, 18명이 부상하고 참수리급 고속정 357호가 침몰하였고, 북괴의 피해는 약 3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SO-1급 초계정 등산곶 684호가 반파된 채로 퇴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해전에서 정장 윤영하 소령(당시 대위, 1계급 추서)이 그 자리에서 중상을 입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사하고, 부정장 이희완 대위(당시 중위)가 쓰러진 정장을 대신하여 지휘권을 행사했는데 이희완 대위는 한쪽 다리를 잃은 상황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휘하여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었습니다.

군의 통수권자인 대통령을 위시하여, 국방장관을 포함한 외교안보관련 정부요인들의 확고부동한 신념이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에 있다고 하면, 일부 북종세력의 눈치를 보느라고, 우리 스스로 국기를 문란하게 만들지 않도록 정말 대통령이 합참 작전상황실에서 언급한 말로만이 아닌 실제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할 것이며, 이번 북괴의 연평도 포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사건을 계기로 대만정부가 금문도 사수를 위하여 최선을 다 한 전례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 우리나라에서 김대중 정부이래 현재까지 꾸준히 준동하고 있는 좌경세력에 의한 감언이설이나 반미감정의 조장으로 불필요하게 안보의 위협을 자초하지 말고, 우리의 동맹국들과 철저히 공조 할 수 있는 외교력을 발휘하면서, 통합된 연합전력을 효과적으로 운영하므로서, 대만정부가 계란으로 바위를 치듯 한 어려운 가운데 자국의 국민과 영토를 굳건하게 지켜낸 그들의 강건한 의지를 중요한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하루 속히, 우유부단하게 포퓰리즘(populism)으로 대중을 선동하는 친북, 종북세력이나 괴뢰들을 추종하는 인사들은 온국민이 단합해 가차없이 과감하게 척결하여, 우선적으로 대내적인 불협화음을 일소해 나가면서, 앞으로는 실질적으로 보다 더 동맹국과의 유대를 공고히 다지고, 말만으로 뒷 북을 치는 지도자가 아닌, 행동으로 실천하는 국방력의 강화, 즉, 유비무환(有備無患)의 대비태세와 소신과 책임정치의 구현을 진심으로 바라는 바입니다.